임금의 곤룡포를 받은 서흔남

임금의 곤룡포를 받은 서흔남

남한산성 관리사무소 앞쪽 화단에는 묘비가 서 있다. 묘비의 위쪽은 깨어져 없어졌고, 남은 묘비마저도 마모되어서 확실한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묘비명에는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이 묘비는 동문 밖 검복리 병풍산 묘소에 있었는데, 그 후손이 화장을 하면서 묘역이 없어짐에 따라,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서흔남의 묘비를 이쪽으로 옮긴 까닭은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을 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 임금의 곤룡포를 하사 받기까지 한 그를 지속적으로 가리고자 함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황급히 피난을 왔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과 함께 송파강을 겨우 건널 수 있었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흩날려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까지 올라 갈 일이 아득했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으나 지친 신하들은 얼마 못 가서 주저 앉기를 거듭했다. 더구나 남한산성으로 가는 산길은 험했고, 때마침 눈이 깊이 쌓여 걸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때 한 총각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나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인조는 그 총각에게 "나를 좀 업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에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더니, 인조를 업어서 성까지 한숨에 모시고 갔다.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산성으로 들어올 때,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신은 것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서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총각은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말했다.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서,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하였다. 
이에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袞龍袍)가 너무 좋아 보여서,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달라."고 하였다. 인조는 흔쾌히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게 벗어주었다. 이렇게 인조를 업고 무사히 산성 안으로 피신시킨 총각이 바로 서흔남이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활약을 펼쳤다. 청나라의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외 교통이 끊어지자, 그는 거지 행세를 하거나 적군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등지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뜻을 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삼 차 왕래하여 적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청과의 전투에도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걸쳐 활약을 펼친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하사 받은 곤룡포를 지극 정성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을 때, 자신이 평생동안 분신처럼 아껴왔던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서흔남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중부면 검복리 서남쪽 병풍산에 묻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서흔남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하찮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정3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렸다고 한다. 후세에 말을 탄 벼슬아치들이 서흔남의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서흔남고 더불어 왕의 곤룡포가 함께 묻혀있기 때문이라 한다. 
한편,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元斗杓)의 비장(裨將)이 되어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공을 세우고 청나라의 장수 양고리(楊古利)를 붙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인조를 업어 모시 사람이 최모(崔某)라고도 한다. 최모는 그 공으로 인하여 늘문이에 임금이 직접 하사한 땅을 받았다고 한다